결혼식 참석을 위해 수원에 갔다가 나혜석 거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화가, 여성소설가,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글을 쓰며 살아온 저 이지만, 어떻게 글을 잘 쓰면서 그림도 잘 그리고 사회적 운동가로도 활동할만큼 사회의식도 뛰어난지 조금은 인간미가 없게 느껴졌습니다. 사진을 보니 단아한 외모에 이정도면 신조어인 '알파걸'에 어울리는 여인입니다. 그녀의 결혼과 외도, 이혼에 대해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나혜석의 결혼
나혜석은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 소설가이자 화가로, 20세기 초반 여성 인권 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녀는 1913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미술을 공부하던 중, 윤세주라는 인물과 만나게 됩니다. 무려 100여년 전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깨어 있었고 진취적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윤세주는 나혜석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으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인연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윤세주는 결혼보다는 독립운동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았고,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후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결혼을 결정하게 됩니다. 김우영은 당시 변호사로 활동하며 재능과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1915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결혼 후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떠나 생활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그림과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나혜석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김우영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나혜석의 자유로운 성격과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성격 차이로 인해 두 사람은 자주 다툼을 벌였고, 이는 나혜석의 정신적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나혜석은 여성으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 했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의 정체성과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나혜석의 외도
나혜석의 인생은 결혼 생활에서의 갈등과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했습니다. 1927년, 나혜석은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여행은 나혜석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 여행에서 나혜석은 일본인 유학생인 최린을 만나게 됩니다. 최린은 매력적이고 지적인 인물로, 나혜석에게 큰 영향을 미쳤기에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고, 이는 결국 외도로 이어졌습니다.
나혜석과 최린의 관계는 당시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해 남성의 잘못보다 여성의 잘못이 더 크게 부각되는 대한민국, 그것도 매우 보수적이던 당시 조선에서 나혜석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는 사건이었습니다. 여성의 순결, 여성의 정절이 중요했던 당시에 나혜석의 외도는 그녀의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사회적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는 이를 통해 여성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강한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나혜석은 이 외도 사건을 그녀가 남긴 많은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여성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며,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했습니다. 그녀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각과 가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혜석은 자신의 외도가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여성 인권 운동의 일환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족히 100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잘잘못의 크기는 공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자는 바람 몇번 필 수 있다고 용인하는 사회에서 여자가 바람을 피는 경우는 용서치 않으며, 남자는 결혼을 몇번해도 껄껄 웃어넘기며 개그 소재로 삼기도 하지만 여성의 삼혼 사혼은 비밀로 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보면 말입니다.
나혜석의 이혼과 이후 인생
나혜석의 외도 사건 이후, 그녀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외도를 용서할 수 없었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됩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아이들과 떨어져 홀로 살아야 했으며, 이는 그녀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이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의 글 중에서 무서울 정도로 솔직하고 충격적인 표현이 등장한 글이 있습니다. '엄마가 된 감상기'라는 제목을 보면 전통적인 대한민국 어머니의 정서와 는 전혀 다른 표현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자식은 어미의 살을 뜯어먹는 악마'라는 표현입니다. 자녀를 위한 삶을 강요 받았던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나혜석'이라는 스스로의 존재가 더 중요했던 그녀의 태도는 누구의 공감도 얻어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혼 후 나혜석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사회적 비난과 편견 속에서 외로움을 견뎌야 했습니다. 나혜석은 자신의 예술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그녀의 삶은 점점 더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948년, 나혜석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녀의 죽음은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작품과 사상은 대한민국 사회, 특별히 여성의 사랑과 인생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역할의 의무 보다는 인간의 존엄을 당당히 이야기 했던 알파걸입니다. 나혜석의 삶은 비록 고단했지만,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조사하는 페이퍼에 '현모양처'라고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만 해도 직업적인 꿈 보다는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에서 역할을 하는 것을 은근히 강요받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나혜석 만큼 명석하지도 용기있지도 않은 저이지만 이혼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닮고 싶은 것 하나가 있습니다. 저도 글쓰기를 절대 멈추지 않겠습니다.